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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

강호동이 인생 성공한 이유를 아는가?

강호동이 인생 성공한 이유를 아는가? 


"5000만명이 고객… 누굴 만나든 '웃겨야 한다'는 강박감 있죠"


“씨름선수 은퇴후 코미디언 이경규 소개로 데뷔

잇단 스캔들에‘진짜 그랬냐’누나가 울면서 전화

대학에 진학 못해 못 배운게 늘 콤플렉스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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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사 간부 후배에게 '압력'을 넣고, 그 후배는 강호동(38)에게 빌고 빌어, 넉 달 만에 성사된 인터뷰였다. 그러자 강호동은 "우하하하, 선생님"이라며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정 그렇다면 하긴 하겠는데, 나 같은 사람을 신문에서 크게 내도 됩니까"라고. 그는 아직 만나지도 않은 나를 먼저 웃기려고 하는 것이었다. 요즘 대통령을 인터뷰하기보다 더 어려운 게 스타 연예인이라고 한다.

그를 일식집에서 만났을 때, 이 점부터 따졌다.

―"나 같은 사람이 신문에 나와도 됩니까"라고 겸사를 떨었는데, 가식적인 쇼인가요? 진심인가요?

씨름 천하장사 출신에서 이제 최고 인기를 누리는 방송 진행자가 된 그는 눈길만 마주쳐도 "우하하하" 터뜨리던 웃음을 딱 멈추었다.

"제가 인터뷰를 잘 안 하는데요, 선생님(이 단어는 그의 습관적 말투임). 왜냐하면 공개적으로 내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굉장히 두렵고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방송에서는 촌놈 이미지인데, 내가 고급스럽게 나가는 것도 맞지 않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이게 겸손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또 누굴 만나도, 재미있어야 한다, 웃겨야 한다,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직업적 강박관념이 있습니다. 누구든 5000만 명(국민) 모두가 고객이니까 부담스럽지요. 방송 진행은 어떻게 하느냐고요? 그건 PD, 작가, 출연자 등 아군(我軍)끼리거든요. 제가 실수를 해도 잘 편집해주니, 편안한 입장인 거죠."

―기자는 아군이 아니라는 거죠?

"그게 아니라…, 독자들이 돈 내고 신문을 사보면서 내 생각을 읽고 싶을까요. 내 신념이라는 게 존경받을 만한 것도 없고. 제 생각은 늘 바뀌어왔거든요. '이게 맞다'고 생각을 했는데, 세월 지나면 저게 또 맞는 거 같아요. 글쎄, 저처럼 귀가 얇은 사람을 세상에 처음 봤습니다. 얼마 전 대선 토론 프로를 볼 때도, A의 얘기를 들으면 B가 나쁜 사람이에요. 그런데 B가 반박하는 걸 들으면, 그게 또 맞아요. 그런 내가 무슨 생각을 이야기한다는 게 굉장히 신경 쓰이는 거죠."

―그럼에도 본인이 최고의 자리에 와있다는 것은 느끼고 있겠지요?

"열아홉 살에 천하장사가 됐을 때, 내 인생에서 사십 대가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씨름이 10년, 방송이 15년이니 이제 배보다 배꼽이 훨씬 커져 버렸어요. 그런데 씨름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샅바 잡고 한두 달 정도 하다보면 옛날 가락이 나와요. 전성기 때보다 체력은 안 돼도, 후배들보다 보는 눈이 훨씬 높습니다. 그런데 방송에서는 아직 기초가 안 돼 있다는 거예요."

―방송 생활 15년이면 기초를 운운할 단계는 지나지 않았습니까?

"가령 이경규 선배님이나 유재석, 신동엽 씨 등은 어렸을 때부터 이를 전문적으로 연구했지 않습니까. 학교도 그런 학교를 나왔고. 그 사람들은 타고난 기본 재능 아래 스스로 기획을 할 줄 알아요. 이들에게 '다음에 하고 싶은 작품이 뭐냐?'고 물으면, 벌써 구상하고 있을 겁니다. 나는 그게 안돼요. 씨름에서도 시작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고등학교 때 씨름을 시작했다면, 중학교 때부터 시작한 웬만한 상위권의 선수들을 절대로 못 따라갑니다. 기초가 안 돼 있는 것, 결국 이게 제 한계가 아닌가. 그 사람들보다 더 노력해도 따라갈 수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내 머리가 나빠서 그렇다면 받아들이겠지만."

―학교서 배웠다고 해봐야, 불과 2~4년 차이 아닌가요?

"배움의 혜택을 못 받은 자격지심인지 모르겠지만. 해본 사람은 그렇게 말할지 모르나, 남들처럼 안 해본 사람에게는 늘 콤플렉스가 되는 거죠. 그래서 배울 게 없어 대학을 안 간다는 식으로 누가 말하면, 내게는 참 비겁한 변명처럼 들립니다."

천하장사 5번, 백두장사 7번을 차지한 그는 22세의 한창 나이에 씨름판을 은퇴했다. 학력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다고 한다. "천하장사를 하는 동안 이만기 형님이 은퇴해 대학 강단에 섰습니다. 그걸 보면서, 실기(實技)로는 A+이지만 지식 없이 살아온 내 삶이 자꾸 걸렸죠. 이론을 겸비하려면 대학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체육특기생'으로 진학하려고 했다. 하지만 특기생 혜택은 '졸업 후 3년 내', 이미 그 기간이 지난 뒤였다.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현장에서 배우는 것 자체가 기초지, 꼭 학교에서 배워야 기초가 되는 건가요?

"씨름으로 보면 강호동은 굉장히 타고난 조건입니다. 당시 키 182cm, 몸무게 125kg, 아주 탄력 있고 허리가 좋았거든요.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나 자신을 훈련해야 하는 지 확실히 알고 있었지요. 하지만 방송에 와서는 방법을 모르겠어요.

대본을 받아 들고, 하얀색 대본이 검은색 대본이 될 때까지 볼펜으로 줄 치면서 외웠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도 안 해본 짓을 처음 한 것이지요. 눈앞에 깜깜한 벽이 서있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 고민 많이 했지요. 그런 고민이 결코 나쁘게만 작용한 것은 아닙니다. 저를 자만이나 방심에 빠지지 않게 만들었지요. 제 확실한 철학이 있다면 '젊은이여 야망을 가져라'가 아니라, '젊은이여 고민을 가져라'는 겁니다. 고민하고 밤새도록 더 고민하라고요."

찻잔을 꿀꺽 비운 그는 슬그머니 방송 진행자로 돌아와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합니까?"라며 질문을 하는 것이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에게 못 이기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에게 못 이긴다'라는 참 좋은 말이 있는데, 저는 그 말을 안 믿었거든요. 노력하는 자보다 즐기는 자가 결국 최상위가 된다는 거죠. 한 분야에서 1등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즐기고 있는 걸까요? 선생님은 즐기는 인생이라고 생각하세요? 인터뷰 일을 즐깁니까?"

내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대답을 하세요. 답을 해야 인터뷰가 진행됩니다"라고 덤볐다. 결국 "힘들어 죽겠다"고 하자, 그는 "봐요, 선생님도 그렇잖아요"라며 깔깔거렸다.

"즐기면서 능력을 발휘한다? 1년 365일 내내 어떻게 즐깁니까? 그건 정말 1%의 천재들 이야기이지요. 저는 서른 다섯 살까지 결코 그걸 못 믿었어요. 하지만 요즘에는 한 단계 올라가는 것인지 '어쩌면 즐기는 자가 이길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가끔 들 때도 있지만요."

―배운 것 없이 씨름판에서 살았는데, 어떻게 해서 방송에서 성공했지요? 그건 타고난 겁니까, 노력한 결과입니까?

"과거에는 노력하고 열심히 하는 것이 '특기'였지요. 요즘은 그건 특기 사항이 아닙니다. 일상에서 숨 쉬는 것처럼, 누구나 다 하는 '기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제가 정말 성공한 겁니까? 정말 그렇다면, 이는 내가 모르는 내 능력을 끄집어내 준 선배와 PD들이 있었던 것이죠. 나는 내 속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모릅니다. 이분들은 뛰어난 감각으로 그걸 미리 봤던 겁니다."

씨름판에서 은퇴한 그가 대학 진학에도 막힌 뒤, 후배들에게 씨름을 가르쳐주며 쉴 때였다. 코미디언 이경규가 그를 불렀다. 그전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잠깐 마주쳤던 인연이 있었다. 이경규는 방송 데뷔를 권하면서 "만약 실패하면 나도 같이 옷을 벗겠다"고 했다. 그런 뒤 "저 친구의 다듬어지지 않은 면을 닦고 보면 빛이 날 텐데"라며 담당 PD에게 소개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소나기'라는 프로에 출연했던 겁니다. 못 배워 좋은 점은 '똥고집'이 없는 거죠. 제 의견이 없어요. 배우지 못한 자로서의 혜택인 거 같아요. 백지(白紙)를 내보이죠. '알아서 잘 칠해 주십시오'라고, 완전히 저 자신을 맡겨버립니다. 다른 진행자들은 얼마간 자기 고집과 색깔이 있으니, 완전 백지가 되기 어렵습니다."

 

―당시 방송 데뷔를 안 했다면 지금 어떻게 됐을 것 같아요?

"그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때 안 했어도 저는 방송을 했을 거 같아요. 운명적인 것을 믿어요. 제가 고민을 많이 하지만, 이를 이겨내는 신약(神藥)은 '운명론' 같아요. 잘되는 일이 있으면 이는 반드시 정해져 있는 거, 안 좋은 일이 생겨도 뭐 어차피 정해져 있는 거라는 식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합니다. 그런 게 나한테 왜 필요했느냐면…."

그는 불쑥 양다리를 들어 올려 바지를 걷었다. 왼쪽 정강이에 있는 지렁이 같은 흉터를 가리켰다. "120바늘 꿰맸습니다. 양쪽 다리 길이와 근육이 다르지요. 왼쪽 발목은 잘 움직이지도 않습니다"라고 했다.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하고 나면서 운명이라는 걸 믿게 됐어요. 고3 때 '전국통일장사'를 따 대학과 프로씨름단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쇄도했습니다. 즐거운 비명을 막 지르고 있을 때, 오토바이를 타다 치명적인 사고가 났어요. 다리가 거의 끊어질 뻔했거든요. 내 인생이 끝난 줄 알았어요. 그때 비로소 철이 들고 많은 생각을 했어요. 섬세해졌고…."

"발목 관절이 잘 움직이지 않는 이 다리로 나중에 천하장사를 했다"는 말을 할 때는, 그의 눈자위가 어둑해졌다.

―방송에 뛰어들어서는 최악의 순간이 언제였지요?

"초반에는 나한테 안 어울리는 옷을 억지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이 많았습니다. 씨름을 하면서 그런 걸 다 경험했기 때문에…. 결국 방송은 씨름과 똑같습니다."

―어떤 상관관계가 있죠?

"하나도 안 틀리고 똑같습니다. 씨름에서 가장 괴로운 때가 동계 훈련입니다. 그 고통은 달리 말로 표현이 안 됩니다. 씨름 시즌은 3월부터 10월까지인데, 동계 훈련의 효과는 3월에 즉각 나타나지 않습니다. 8월, 9월쯤 가야 효과가 나타납니다. 그 효과란 끝까지 버티는 정신력입니다. 방송 진행도 체력전입니다. 몇 시간씩 녹화 방송을 제작하기 때문에 지치면 안 됩니다. 내가 지치면 출연자가 지치고 출연자가 지치면 프로그램 진행이 안 됩니다. 씨름은 체력전, 방송 진행은 심리전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방송 진행에 더 체력이 필요하지요. 하루 중 쉬는 시간이면 거의 체육관에서 삽니다."

―'무릎팍 도사'가 출연자에게 '막가파' 식 질문을 해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데.

"결코 '막가파' 식은 아닙니다. 제가 볼 때는 질서가 있습니다. 공과 사는 반드시 구분합니다. 공인(公人)이다 보면 안 좋은 일도 있을 수 있는데, 그게 사적인 부분이라면 궁금해도 억제를 합니다. 공적인 부분이라면 그 사람 이미지에 좋지 않더라도 질문할 수 있는 거죠. 저로서는 놀라운 거 재미난 거 신나는 거를 끄집어내고 싶은 욕구는 있지만, 한편으로는 보호해야 된다는 생각도 동시에 있지요."

―그런 질문을 하겠습니다. 얼마 전까지 연예계 스캔들의 상대역으로 종종 등장했지요.

"그런 소설이 재미있습니까. 씨름 선수 출신이니까 힘세고 정력 좋은 걸로만 연상이 되니…. 그냥 그런 줄 알고 넘어갔는데, 외국에 사는 누나가 한번은 울면서 '너 진짜 그랬냐'며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이만기 형님도 그런 소문에 많이 휩쓸렸다고 합니다."

힘만 셀 것 같은 남자로 비치지만, 그는 한 세기가 저무는 1999년 12월 31일 '미래의 자녀들에게'라고 편지를 쓰는 감상(感傷)도 보인다.

"그날 밤 술자리를 고사하고 집에 돌아와 생각에 잠겼어요. 내가 아버지, 어머니에 대해 무얼 알고 있나. 아버지는 20대에 무슨 야망을 갖고 있었을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을까. 이런 것이 궁금하더라고요. 아마도 내 2세도 그렇게 궁금해하지 않을까. 밀레니엄 때 제일 중요한 시간을 나는 너한테 투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요. 내 아이가 생겨 사춘기를 거쳐 반항할 때쯤 보여주려고 합니다. 지금도 보관 중인 보물 1호입니다."

―진행자로서 어떤 출연자가 까다롭습니까?

"숨기는 자가 우리 MC의 최대의 적입니다. 개인적으로 같이 일하는 후배 작가나 MC들에게 '출연자가 잘했느니 못 했느니 타박하지 마라. 그 재능을 안 보여주려는 출연자에게 그걸 끄집어내는 것이 MC의 몫이다'라고 말합니다. 재능을 숨기는 출연자를 만나면 정말 힘들고 부담스럽지요. 분명한 점은 주인은 불평할 수 없다는 겁니다."

―누군가가 "이 채널을 틀어도 강호동, 저 채널을 틀어도 강호동"이라고 했다는데, 온 사방에 나와서 본인이 진부해질지 모른다는 생각은 안 드나요?

"이제는 방송사별로 프로그램 한 개씩만 합니다. 결코 많이 한 것은 아닌데. 정말로 우리에게는 마지막까지 사수해야 할 게 식상하다는 소리를 안 듣는 겁니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철학을 가지고, 막을 수 있을 만큼 다 막아야 하죠."

―강호동씨에 대해 '사투리 억양 등 언어와 발음에 문제가 많은 진행자'라는 지적이 있던데.

"그것 또한 최고의 콤플렉스죠. 정상적으로 말하면 강호동이 MC를 한다는 것이 정상적인 것은 아니죠. 하지만 세월이 좋아져서, 그 사투리 톤을 오히려 더 상품으로 만들어낼 수 있게 된 거죠."

―요즘 유행어로 '비호감'이라는 말도 좀 듣지요?

"제가 기본적으로 호감 사이즈가 아니지 않습니까. 비 올 때 우산을 쓰지만 비를 한 방울도 안 맞을 수 있습니까? 안 맞고 싶으면 집을 안 나가야죠. 누군가를 만나봐야 하고 목적이 있어서 가야 하는데, 비가 와서 안 나간다면 그게 말이 됩니까? 우리한테는 우산이라는 무기가 있는데. 5000만 명이 다 고객인데."

그는 방송 진행에서 그렇듯이 인터뷰 내내 소리를 지르다시피 했다. 이 때문에 '단순 무식', '미련 곰탱이'라는 이미지도 있다. 그건 전략일 뿐, 속아서는 안 된다. "어느 쪽이냐?"는 물음에, 그는 "우하하하, 선생님. 굳이 치자면 난 여우에 가깝죠"라고 했다.
 

한때 이만기와 함께 합숙?“주량은 소주 2병”

강호동은


인터뷰를 끝내고 나오니 식당 종업원들이 모두 몰려들어 기념촬영을 요구했다. 광화문 거리에서는 지나가는 차도 멈춰 서서 사인을 요구했다. 행인들마다 "강호동"이라며 핸드폰으로 찍어댔다. 그는 작년 말 'SBS 연예대상'을 받았다. KBS '1박2일', SBS '스타킹', MBC '무릎팍 도사'에서 메인 진행자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그는 "내 전성기는 지금이 아니라 앞날에 있다"고 했다.

아버지의 권유로 중학교 2년 때부터 씨름을 위해 합숙생활을 했다. 당시 이만기 선수와 함께 지냈다. 1989년 프로씨름단 '일양약품' 프로전적 3승(승률 10% 미만)인 그가 280여승의 이만기(승률 9할)를 상대로 이겼고, 그의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1992년 '예상을 깬' 은퇴를 했다. 이듬해 방송계에 데뷔해, 현재 최고의 MC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사람에 대해 관심이 가장 많다"며 "방송을 하면 다양한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것처럼 비치지만 실제로는 깊이 만나는 사람이 드물고 관계 폭도 좁다"고 말했다. "사람 만나 궁금증을 푸는 기자직업을 했으면 잘 했을 것 같다"고도 했다. 또 그는 "소주 20병쯤 마실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두 병이 정량"이라고 했는데, 함께 마신 사람들은 그 앞에서 모두 쓰러진다고 주장했다.

[최보식 기자 congchi@chosun.com]